[한국정책방송=이성렬 기자]
◇ 한계가 있는 생명을 바라본다!
모두가 소중한 생명, 소중한 것이 계속 있어 주면 좋겠는데,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인생은 덧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을, 또 수명이나 다른 원인으로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 오늘 식사는 뭐였습니까? 밥, 빵, 고기, 생선, 야채.., 그 중에는 채식주의자 분도 있다. 사실은 야채와 식물도 생명이 있다. 그 생명들은 각각 한구석에서 틀림없이 훌륭하게 살고 있었다.
우리 인간이 상생의 목소리를 높여 주장해도, 생명을 소중히 하라고 호소해도 우리는 다른 생명을 빼앗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생명을 앗아간다는 점에서는 결국 인간은 이기적이다. 식사를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또 나무를 베어 집을 짓거나 녹색의 산과 들을 불도저로 택지 개발을 하지 않으면 인간이 살 곳이 부족하다. 인간이 자연을 희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숙명과 현실은 명심해야 할 아픔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생명의 은혜로부터 살고 있다. 그 덕을 받고 있다는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우리들의 생명은 누구나 똑같이 한계가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존엄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명처럼 자신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자신의 역할을 매일 충실하게 또 생생하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안타깝지 않을까?
◇ 연결되어 가는 생명, 모두가 형제다!
어느 집에 아기가 탄생했다. “잘 태어났네. 태어나줘서 고맙다!”며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은 아기를 맞아들이고 새 가족이 늘어난 것을 축하한다. 사람은 울면서 태어나는 생명의 탄생이라는 신비함에 일희일비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탄생을 감사와 축복하는 마음이나 메세지로 시작해 부모와 아이의 유대감은 마음 깊은 곳에서 지탱해 간다.
사람은 모두 삶으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에 이르지만, 삶을 차세대에 맡김으로써 삶이 연결되어 간다. 가족으로 말하면 조부모님, 부모, 자식, 손자 이렇게 이어져 가는 생명이다. 우리가 조상이나 자손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3세대 정도까지겠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어쨌든 2명의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모가 또 두 명씩 해서 네 명 이렇게 배로 늘어단다.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와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조상의 숫자는 늘어난다.
이걸 계속 계산을 하다 보면 20대 조상 앞에는 100만 명이 넘어서 말도 안 되는 숫자가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류 모두가 형제이자 조상들은 다 똑같다. 그러니까 결국 어떤 면에서는 모두 형제라고 의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끼리 상처를 받거나 다른 생명을 소홀히 취급하는 일도 없지 않을까?
◇ 영원한 생명과 연결고리를 쌓아가자!
"사람은 죽으면 끝일까요?" 아니다. 그렇지 않다. 마음으로서의 목숨, 영혼으로서의 목숨은 무한하며 영원한 생명이다. 예컨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부모를 잃었을 때, 슬픔이 넘침과 동시에 추억이 가득 남는다. 부모의 여러 가지 이미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동안 자신을 키워주고 함께 생활해 온 부모의 은혜에 고마움을 가질 것이다. 추억은 가족이나 친구들 마음속에 잘 새겨져 살고 있다. 이런 기분이야말로 설령 사람이 죽더라도 육체는 없어진다 해도 그 사람이 새롭게 살기 시작하는 생명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또 최근에 감동 받은 책이나 영화는 없었나요? 영화와 문학 작품, 그림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 작가는 타계했을지도 모르지만, 훌륭한 문학 작품은 여러 사람들에게 전승되고 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전시물 속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본 사람은 그 시대 삶과 숨결을 절로 느끼며, 이미지를 그려낸다.
유구한 낭만이 넘치는 고대 유적과 건축,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모두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사람들은 인정하고, 잊지 않는다. 눈앞에 당당히 드러나 있는 진리를 무심히 바라볼 때 모든 것을 감싸는 큰 의미의 생명 속에서 삶과 죽음을 깊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대자연의 모두가 고귀한 모습으로 조금도 숨김없이 눈앞에 당당히 드러나 있는 진리를 무심히 바라본다. 이때 모든 것을 감싸는 큰 의미에서 생명 속의 삶과 죽음을 깊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리고 산다는 영원한 생명과 연결고리를 쌓아간다. 그래야 비로소 만물에 생명이든 영혼이든 마음이든 크게 감수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규철 / 법학박사(신중년행복디자이너) 일본(와세다대), 중국(복단대)유학 한국정책방송 전문위원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자문교수 <저작권자 ⓒ 한국정책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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